고인에게서 온 카톡
2019.12.16 조회수 127

 

 

 

얼마 전 일이다. 애도상담전문가 교육이 끝나고 난 어느 화요일 저녁 8시 50분경이었다. 담당 실장이 내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회장님, 저기요...”

 

“왜요?”

 

“천OO 선생님이요...”

 

“네. 천OO 선생님이 왜요?”

 

“천OO 선생님이 돌아가셨어요.”

 

“네? 뭔 소리에요?”

 

2년 전 애도상담전문가 교육을 수료하고, 상담사로 활동하시던 천OO 선생님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다. 며칠 전까지도 만나 이야기 나누던 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난 후 다가온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운전을 하고 집으로 가는 짧은 시간에도 마음이 떨려서 운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서둘러 상담사 단톡방에 사실을 알렸다. 사별슬픔을 위로하고 상담하는 우리들도 서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과 놀람을 표현하였다. 다음날 장례식장에 가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단톡방에 글이 올라왔다는 알람이 핸드폰에 울렸다. 그런데 이름을 보니 천OO선생님이었다. 뭐지? 죽은 사람이 글을 올렸다고? 순간 깜짝 놀랐다. 어떤 글인지 얼른 확인해 보았다. 단톡방에 들어가서 내용을 확인하니, 자녀들이 감사 인사를 남긴 것이었다. 아! 핸드폰. 자녀들이 어머니 핸드폰의 단톡방을 발견한 거였구나! 아마도, 자녀들은 어머니 핸드폰의 카톡 단체방들 마다 그렇게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사실, 지인이나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가서 상주에게 위로를 전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아는 당사자가 돌아가시게 되면 장례식장에 혼자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 속담에 ‘정승 댁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많은데,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물론 살아있는 정승과 친분을 과시하거나 조문을 통해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하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관계하던 지인이 죽게 될 경우, 장례식장에 가는 것이 망설여지기는 것이 사실이다. 영정사진 앞에서라도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지만, 상주도 모르고, 가봐야 아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조문을 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손을 맞잡고 나면 바로 장례식장을 나온다. 조의금을 내면서도 ‘가족들이 내가 누군지 알까?’하는 마음으로 하게 된다. 몇 번 그런 경험이 있는데 대부분 문자 인사도 오지 않는다.

 

그런데, 고인이 된 상담사의 자녀들은 장례식에 조문 온 분들과 더불어 어머니와 관계했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사를 남긴 것이다. 남겨진 메시지를 보고 순간 목이 메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의 핸드폰!” 자녀들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될듯하다. 그 곳에 사진들을 비롯하여 어머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흔적들을 지우기 쉽지 않을 것이다. 폰을 해지하고 카톡을 지우는 것이 고인과의 관계를 영원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아 힘들 것이다. 페이스북, 밴드, 카페 등 온라인 SNS에 남겨져 있는 다른 흔적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갑작스런 죽음이기에 얼마간은 그 핸드폰이 울릴 것이고 “어머니의 죽음”을 반복해서 알려야할지도 모른다. 죽음을 상기해야 하는 순간이 괴롭다할지라도 죽음을 말하며 전화를 건 분과 잠시라도 어머니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나누면 좋겠다.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사별로 인해 슬퍼하는 유가족들에게 고인의 죽음과 그 상황에 대해 다시금 꺼내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냐는 질문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대답은 명확하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가 사별슬픔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애도의 과정을 촉진한다고 믿는다. 오히려 유가족들은 고인에 대한 좋은 추억을 함께 나누며, 그가 남겨준 소중한 삶의 가치를 되새기고 싶어 한다. 자신이 잘 알지 못했던 고인의 미담은 애도 과정에서 고인의 대한 의미를 재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세월호 사건 이후 유가족과 시민들을 위해 전문적인 심리지원을 하고 있는 안산온마음센터가 있다. 일 년 전부터 상담사들과 사례 관리자 상담수퍼비전을 위해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 후 센터에서는 유가족 아버지들을 위한 상담세미나를 내게 부탁했다. 십 여분의 유가족 아버지들이 모였다. 집단상담의 형식으로 짧은 강의를 한 후에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때 한 아버지로부터 애도에 있어 소중한 가치 두 가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함께하기’의 가치이다. 2016년 8월까지 유지되었던 ‘기억교실’을 이전할 때였다. 부모들은 유품 상자 안으로 아들딸들의 유품을 옮겨야 했다. 자녀들의 흔적이 오롯이 담겨있는 교실을 내어주고, 유품을 하나하나 챙기던 그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한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유품을 정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한 자원봉사자가 곁에 있다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 주었는데, 그 손길이 얼마나 따뜻하고 위로가 되었는지 아직도 그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누군가 슬픔의 현장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과 위로가 된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잡은 손으로 마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추억하기’의 가치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로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가족들의 애도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표현하기’를 돕기 위해서는 적절한 질문이 필요하다. 적절한 질문은 좋은 애도를 돕는다. 한 아버지는 자원봉사자로부터 아이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 아버지는 세월호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아이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봉사자는 아이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아이였는지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을 받고 아이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이의 성격, 아이가 좋아했던 것, 자랐던 과정에서 인상에 남는 일 등을 쏟아 낼 수 있었다. 그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아마 밤을 새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상실의 아픔을 드러나게 하거나 슬픔을 가중시키지 않는다. 좋았던 추억 혹은 미안했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슬픔을 덜어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숨기고, 감추고, 억눌린 감정들이 오히려 문제가 된다. 심리적으로 뿐 아니라 신체나 행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누군가 내 마음을 들어줄 친구가 있다면 그에게 마음을 열어보자. 시간이 많이 지나 새롭게 올라오는 감정들, 고인에게 새로 발견한 가치들, 이후 변화된 자신의 삶 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면서 좋은 애도의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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